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월튼 워커 (문단 편집) ====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 1950년 7월 26일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대구에 대한 북한군의 군사적인 압박이 증가하자 미 제8군 사령부의 부산 이전을 미 극동군사령부에 요청했다. 워커 중장은 단지 사령부만 이전하는 것이지 전투부대를 부산으로 철수시키겠다는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극동군사령부 참모장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은 "미 제8군 사령부를 부산으로 옮긴다는 것은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릴 우려가 있으며, 미 제8군이 더 이상 한국에서 지탱을 못하고 철수를 개시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사령부 이전을 반대하였다.[*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20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5집 낙동강선 방어작전, 75페이지.] 알몬드 소장은 워커 중장의 요청을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보고하고, 맥아더 사령관의 한국 시찰을 건의했다. 맥아더 원수는 다음 날인 7월 27일 알몬드 소장을 비롯한 참모들을 대동하고 대구를 방문했다. 맥아더 원수는 대구에서 워커 중장에게 "미 제8군이 현 진지를 고수해야 된다"면서, "더 이상의 후퇴는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미 제8군 참모장교들에게 "한국에서 철수란 있을 수 없으며, 한국 전선에서 제2의 [[됭케르크 철수작전|덩케르크]]가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207, 미 육군 군사 연구소, 6.25 전쟁사 5집 낙동강선 방어작전, 76페이지.] 이때 맥아더 원수는 1950년 6월말 한강방어선 시찰을 하고 나서 구상했던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완성해놨고, 미 육군부에 이미 보고까지 마친 상태였다. 인천상륙작전 계획의 전제조건으로 달려 있던 게 바로 낙동강 방어선의 유지였기 때문에, 낙동강 방어선 사수는 맥아더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Stand or die.'''" 자리를 지키거나 죽어라. >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더 이상의 후퇴, 철수, 방어선 재조정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퇴각할 곳은 없다...''' >'''[[됭케르크 철수작전|덩케르크]]나 [[바탄 죽음의 행진|바탄]]같은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학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다. 만약 우리 중 일부가 반드시 죽어야 된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 방어선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했으면 한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 >We are fighting a battle against time. There will be no more retreating, withdrawal or readjustment of the lines or any other term you choose. There is no line behind us to which we can retreat.…There will be no Dunkirk, there will be no Bataan. A retreat to Pusan would be one of the greatest butcheries in history. We must fight until the end.…We will fight as a team. If some of us must die, we will die fighting together.…I want everybody to understand we are going to hold this line. We are going to win. >---- >1950년 7월 29일 예하 사단에 대한 8군 사령부의 명령서. (출처: [[http://www.historynet.com/stand-or-die-1950-defense-of-koreas-pusan-perimeter.htm|http://www.historynet.com]],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0/16/0200000000AKR20151016178951043.HTML|연합뉴스]]) 맥아더에게 사령부 이전을 요청했다가 거절 당한 그는 할 수 없이 “부산으로 밀리면 [[학살|대살육]]이 일어난다. 오직 버티느냐 죽느냐(stand or die)의 선택밖에 없다”며 장병들을 독려했다. 문제는 좁디좁은 낙동강 전선에서도 전개한 유엔군의 병력은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말 그대로 버티기도 어려울 정도로 얇은 선을 그은 건데, 결국 부대 전체가 일종의 소방대처럼 한쪽의 위기가 발생하면 다른 쪽의 병력을 빼서 그쪽을 틀어막는 전략이었다. 그것도 북한의 [[방호산]] 장군이 지휘하던 북한군 6사단이 마산 쪽으로 측면 기습을 시도하는 바람에 이 전략도 무너질 뻔했다. 어렵고 어려운 상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